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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大門放火の疑い
남대문 방화 추정 불… 1, 2층 전소후 화재 발생 5시간여 만에 진화
記事


10일 오후 8시48분쯤 국보 1호인 서울 중구 남대문(숭례문)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2층 누각이 완전 붕괴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1층 누각도 완전 연소되는 등 크게 훼손됐으며 불은 2층 누각이
굉음 소리와 함께 완전 붕괴된 직후 화재 발생 5시간여
만인 11일 오전 1시55분쯤 꺼졌다.
소방당국은 11일 오전 2시50분 현재 남은 잔불 정리를 하고 있다.

◆화재 발생

10일 오후 8시48분쯤 서울 중구 남대문4가 남대문 누각 2층
지붕에서 흰 연기가 발생했다.
최초 불길은 외부로 치솟지 않았고, 은 연기만 나왔다.

소방당국은 신고를 받고 펌프차와 고가 사다리차 등 소방차
32대와 소방관 128명을 곧장 현장에 출동시켰다.

곧 잡힐 듯 했던 남대문 화재는 그러나 화재 발생 2시간쯤부터
육안으로도 지붕 위 불길이 확인될 정도로 화재가 심각해졌다.
화재 발생 4시간 정도가 지난 11일 오전 0시30분에는
불이 2층 누각 전체로 완전히 번졌고, 오전 0시40분쯤
누각 일부 기왓장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2층 누각 지붕이 무더기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형체를 잃어가던 2층 누각은 오전1시50분쯤 완전 붕괴돼
1층에 포개졌다.

◆왜 피해컸나

이날 화재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이유는 기와 안쪽에서
불이 발생해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서울소방방재본부에 따르면 숭례문 지붕은 맨 위 기와가,
바로 아래 흙이 있으며 그 아래 '강화다짐'과 '적심', '회벽바름' 등의
순으로 구성돼 있다.

강화다짐과 회벽바름은 전통 목조건물에 흔히 사용되는 방수공법으로,
그 사이 적심까지 불이 발생했다면 아무리 물을 뿌려
발화지점까지 물이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소방당국의 설명이다.

소방 당국은 이러한 방수공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후 10시30분쯤
연기가 줄어들자 화재가 진압된 것으로 판단하고, 잔불 진화작업에 나섰다.
현장 소방관들은 취재 기자들에게 "대충 불길을 다 잡고
잔불처리 작업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방 당국 판단과 달리 오후 10시40분쯤 숭례문 2층 현판 부군에서
직경 6m가량 불길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소방 당국이 이 불길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불은 오후 11시쯤
2층 지붕 전체로 번졌으며, 11시50분쯤 지붕 위로 옮겨 붙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소방당국이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화재 초기 지나치게
신중하게 대응하다 오히려 화를 키웠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숭례문 화재가 발생해
10일밤 서울소방본부 측이 대전에 있는 문화재청과 연락해
화재 진압방식논의했으나 이 과정에서 문화재청이
'문화재가 손실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불을 꺼 달라'고 당부하는 바람에
초기 적극적인 진화에 나서지 못했다"고 밝혔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은 YTN에 출연해
"소방당국이 초기 진화에 실패한 것이 화재를 키운 가장 큰 원인"이라며 "
헬기동원하거나 근접 집중 분사 등 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했다"고 지적했다.

관리 당국인 중구청과 문화재청이 스프링클러 등 기본적인 방화
시설조차 갖추지 않았던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남대문 내부에는 화재를 대비한 스프링클러가 없었으며,
소화기 8대도 1, 2층에 나누어 비치되는 등 소방시설이 미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지기 등 화재 경보설비도 없는 상태로 확인됐다.
또 홍예문이 개방되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8시 사이에 평일 3명,
휴일 1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관리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인경비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이번과 같이 홍예문 폐쇄 시간에 발생한 화재 상황에는
신속대처가 어려운 상황이다.

황 위원은 "스프링클러는 동절동파 위험이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필요했다"며 "근본적으로 목조문화재 화재대응원칙이 없는 등
문화재 방재시스템의 부재가 화를 불렀다"고 강조했다.

◆"화재 원인 방화로 추정"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남대문 누각은 일반인 접근이 금지돼 있어
방화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보고, 야간 조명을 위해 설치한 전기 시설에서
누전이 발생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했다.

그러나, 소방관이 실제 2층 누각에 올라보니 전기시설이 없었던 것이 확인됐고,
방화 가능성을 제기하는 제보잇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택시기사 이모(44)씨는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50대 정도로 보이는 어떤 남성이 쇼핑백을 들고 남대문 옆 계단으로
올라갔다"며 "잠시 후 남대문에서 불꽃놀이를 하듯 빨간 불빛
퍼져 나왔고, 신고를 하고 보니 그 남자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항공점퍼와 검은색 등산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불이 난 뒤 계단을 내려와 유유히 걸어서 도망갔다고 이씨는 전했다.

이씨는 "경찰이 그 남자를 쫓아가지 않아 직접 차를 몰
쫓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소방관과 함께 경찰 40여명도 화재 현장에 출동해 화재 원인을 조사했다.
경찰은 이씨가 진술한 50대 방화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A(55)씨를
현장 부근에서 붙잡아 조사를 벌였지만 알리바이가 확인돼 귀가조치했다.

경찰은 방화와 누전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화재 당시 상황이 찍힌 CCTV 확보총력기울이고 있다.

◆피해 규모는

남대문(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95년(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된 누
각형 2층 건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으로
1961~1963년 해체·수리 작업이 이뤄졌다.

남대문은 지난 1962년 12월 국보 1호로 지정된 이후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 문화재로 현존하는 한국 성문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이후 500년 동안 몇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1층은 완전히 전소돼 붕괴됐으며, 2층도 전소돼 뼈대만 남은 상태다.

화재가 커지면서 소방당국이 떼어낸 현판 '崇禮門(숭례문)'은
이날 2층 아래로 떨어져 귀퉁이가 일부 훼손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적혔다고 전해진다.
지봉유설에는 현판 글씨를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보 1호' 남대문 전소
記事


남대문은 목조 기와집 구조여서 화재가 발생하면
먼저 기와부터 깨면서 진압을 시도해야 하는데도, 국보 1호 문화재라는
이유 때문에 소방 당국이 주춤거리며 적극적으로 화재 진압에
나서지 않아 결국 전소·붕괴 사태야기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남대문을 비롯한 기와지붕 구조 건축물의 경우, 기와 아래에 황토 층이 있고,
그 아래에 대들보와 기둥 등 목조 구조물이 있다.
때문에 기와집에 불이 나면 기와 아래에서 나무들이 타기 때문에
지붕 위와 아래에서 아무리 물을 도 기와 바로 아래의 불은
잘 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게 소방 건축 전문가들 설명이다.
특히 목조 건물은 불이 꺼진 듯 해도 다시 살아나는 특성이 있어
진압이 더 어렵다고 한다.
소방방재청 고덕근 소방경은 "그렇기 때문에 소방관들은 일반 기와집에
불이 나면 기와지붕부터 뚫어놓고 소방호스를 집어넣어
물을 쏟아 붓는 작전을 쓴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방당국은 남대문이 국보 1호 문화재여서 섣불리 기와를 깨고
소방호스를 집어넣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2008/02/11



"南大門放火の疑いの火事・・・1.2階 全焼後火災発生5時間程で鎮火"

10日午後8時48分頃、国宝1号のソウル中区南大門(崇禮門)で
放火と推定される火災が発生して2階楼閣が完全に崩壊されるなど
大きな被害が発生した。
1階楼閣も完全燃焼されるなど大きく毀損されて火は2階の楼閣が
大きな音と共に完全に崩壊された直後、火災発生5時間ほどの
11日午前1時55分頃消えた。
消防当局は11日午前2時50分現在残った火の処理をしている。

◆火災発生

10日午後8時48分頃、ソウル中区南大門4街南大門楼閣の2階の
屋根から白い煙が発生した。
最初 炎は外部に向かわず濃い煙だけ出た。

消防当局は通報を受けてポンプ車と高いはしご車など消防車
32台と消防官128名をまっすぐ現場に出動させた。

すぐ鎮火するだろうと思われた南大門の火災は、しかし、火災発生2時間たった頃から
肉眼でも屋根の上の炎が確認できるほど火災が深刻になった。
火災発生4時間ほどが過ぎた11日午前0時30分には
火が2階の楼閣全体を完全に覆い、午前0時40分頃
楼閣の1部のかわらが崩れ始めた。
以後2階の楼閣の屋根が山のように落ち始め、
少しずつ原形を失っていった2階の楼閣は午前1時50分頃完全に崩壊され
1階に重なった。

◆なぜ被害大きいか

この日火災で莫大な被害が発生した理由はかわらの中側から
火が発生して鎮火が困難だったためと分析されている。

ソウル消防防災本部によれば"崇禮門の屋根は一番上のかわらが
すぐ下の土がその下の"강화다짐"と "적심""회벽바름"などの
順番で構成されている。

"강화다짐"と "회벽바름"は伝統木造建物によくしようされる放水工法
その間の "적심"まで火が発生されたならいくら水を掛け
発火地点まで水が到達できないというのが消防当局の説明だ。

消防当局はこのような放水工法を理解できてなくて午後10時30分頃
煙が減ると火災が鎮圧されたものと判断し残った火の鎮火作業に出た
現場の消防官たちは取材記者に"だいたいの火は消して
残った火の処理の作業だけ残ったと言った。

しかし消防当局の判断と違い午後10時40分頃崇禮門2階
현판付近から直径6mほどの火が再び上に向かって立ち上がり始めた。

消防当局がこの火を消せずにいる間、火は午後11時頃
2階の屋根に広がり、11時50分頃屋根の上に移ったと知らされた。

また、消防当局が文化財の毀損おそれて火災初期に慎重に過ぎた対応し、
むしろ火を大きくしたという分析説得力を得ている。

消防当局の関係者は連合ニュースとインタビューで崇禮門の火災が発生して
10日の夜ソウル消防本部が대전にある文化財庁と連絡して
火災の鎮圧方式議論したがこの過程で文化財庁が
文化財が損失させないように慎重に火をけしてくれと頼み込んだせいで
初期の積極的な鎮火に出れなかったと発表した。

황평우文化連帯文化遺産委員会の委員はYTNに出演して
消防当局が初期の鎮火に失敗したのが火災を広げた一番の原因だとし、
ヘリコプター動員したり接近集中噴射などもっと積極的な対処
必要だったと指摘した。

管理当局の中区庁と文化財庁がスプリンクーラーなど基本的な放火施設すら
備えていなかった点も問題として指摘された。

南大門の内部には火災を備えたスプリンクーラーがなく
消火器8台も1.2階に分けて置くなどの消防施設がずさんだったことがわかった。
感知器など火災警報設備もない状態で確認された。
また、홍예門が開放される午前10時から午後8時の間の平日3名、
休日1名の職員が常駐しながら管理するがそれ以降は
無人警備システムに頼っている。
今回のように홍예門の閉鎖時間に発生した火災の状況では
迅速対処が難しい状況だ。

황委員は"スプリンクーラーは冬季って破裂する危険がある短所があるが
それでも基本的に必要だった"とし"根本的に木造文化財の火災対応原則がないなど
文化財の防災システムの不在が災いを呼んだと強調した。

◆火災原因は放火に推定

消防当局は火災初期の南大門の楼閣は一般の接近が禁止されていて
放火の可能性がすくないと見て夜間の照明を設置した電気施設から
漏電が発生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観測をした。

しかし、消防官が実際2階の楼閣に登ったら電気施設がなかったことが確認され
放火の可能性の情報提供も相次ぐ状況だ。

タクシー運転手のイ○さんは"近所でお客さんを待っている時
50代ぐらいに見えるある男性がショッピングバックを持って南大門横の階段に
上がって行った"とし"しばらくして南大門から花火のような
赤いが出てきて通報をしたら大所が降りてきた"と言った。

この男性は航空ジャンパーと黒の登山パンツを履いていて、
火が出た後階段を下りてきて悠々と歩いて去っていったとイさは伝えた。

イさんは"警察がその男に追いつけなかったから直接車に乗って
追いかけたが見つけ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と付け加えた

消防官と一緒に警察400名も火災現場は出動して火災原因を調査した。
警察はイさんが言った50代の放火容疑者と人相着衣が似ている
Aさんを現場付近で引き止め調査に取り掛かったがアリバイが
確認されて釈放した。

警察は放火と漏電などすべての可能性を念頭に置き調査を始めていて、
火災当時の状況が写ったCCTV確保総力を挙げている。

◆被害の規模は

南大門(崇禮門)はソウルに残っている木造物の中で一番古いもので
1395年(태조4年)に立て始めて1398年(태조7年)に完成された
楼閣型の2階の建物だ。
現在残っている建物は세종29年(1447)に立て直したもので
1961~1963年解体修理作業が成し遂げられた。

南大門は1962年12月国宝1号として指定された以降
名実共に国内の代表文化財として現存する韓国の城門の建物としては
一番規模が大きい。
以降500年の間何度となく修復を経て今まで伝わっている。

現在1階は完全に全焼崩壊され、2階も全焼し骨組みだけ残った状態だ。

火災が大きくなりながら消防当局が取り外した현판崇禮門は
この日2階の下に落ちてが一部毀損されたと伝えられた。

この현판は冠岳山の火気を押さえつけるために縦に書かれたと伝えられている。
지봉유설には현판の文字を양녕王が書いたものと記録されている。


国宝1号南大門全焼

南大門は木造かわらの構造で火災が発生したら
まずかわらから壊しながら鎮圧を試み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国宝文化財と言う理由で
消防当局が躊躇し積極的に火災の鎮圧に
立ち入れず結局全焼崩壊の事態を招いたと明らかにしている。

南大門をはじめかわら屋根の構造建築物の場合、かわらの上に黄土があり
その下に大黒柱などの木造構造物がある。
そのためかわらの家が火事になればかわらの下から木が燃えるので
屋根の上と下からどんなに水を打ってもかわらとすぐ下の火は
よく消えない特性があるというのが消防および建築専門家たちの説明だ。
特に木造建築は火が消えたようでも再びよみがえる特性があって
鎮圧がもっとも難しいと言う。
消防防災庁の고덕근消防警は"そのために消防官は一般のかわら家が
火事になれば瓦屋根をどかしてホースを入れて
水をいっぺんに打つ作戦を使う"と言った。

しかし消防当局は南大門が国宝1号の文化財なのでむやみに瓦を壊し
ホースを入れ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と強調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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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1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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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とコカコーラが戦う

【물과 코카콜라가 다툰다】    글: 이유진(환경 운동가)



전 세계를 통틀어 하루 동안 팔리는 코카콜라는 10럭잔.
10초마다 세계 12만 6천 명이 코카콜라를 마신다.
1886년 미국 애틀랜타의 약사였던 존 펨버턴이 두통덜어줄 응급제로 만들어 낸 코카콜라는 오늘날 브랜드 가치로만  705억달러,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곳이라 할지라도 코카콜라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이야기 하듯 코카콜라는 세게 200여 개국에서 판매된다.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함과 더불어 코카콜라는 20세기 미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세계 시민들은 지나친 미국의 상업주의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안티-코카콜라' 캠페을 통해 나타내고 한다.
최근 이라크 전과 관련해 프랑스와 이슬람을 중심으로 '메카콜라', 아랍콜라'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과 한국에서 동계 올림픽 오노 선수의 반칙맞서 미국 제품 불매운동 상징으로 코가콜라가 표적이 되었던 것도 같은 까닭에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코카콜라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 남부 플라치마다 마을은 대표적인 코카콜라 저항지아다.
이곳에서 코카콜라가 지하관정 여덟 개를 어 지하수를 마구 퍼올린 결과, 땅이 황폐해지면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푸른 잎의 야자수는 시들어가고 있다.
주민들은 ' 코카콜라 공장이 날마다 100만 리터나 되는 지하수를 품쳐가고 있다 ' 고 주장한다.
100만 리터면 2만 영이 하루 동안 생활할수 있는 양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코카콜라는 엄청난  '물 도둑'인 셈이다.
1998년 코카콜라 공장이 들어선 뒤로 마을 부녀자들은 매일 5킬로미터나 떠ㅓㄹ어진 다른 마을까지 물를 길으러 다녀야 했다.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코카콜라 공장에서 나온 오염 때문에 모든 우물이 먹는 물로 마시기에 부적합하다는 결과까지 나왔다.
마을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코카콜라사에서 코카콜라를 만들고난 찌꺼기를 농부들에게 퇴비 명목으로 제공했는데 그 찌꺼기 속에서 카드뮴과 같은 독성물질이 나온 것이다.
약 2천 명의 시위대가 코카콜라 공장으로 몰려가 공장 폐쇄를 요구했고, 코카콜라사를 상대로 지하수를 둘러싼 소송을 시작했다.
결국 2003년 12월 케랄라주 고등법원에서는 코카콜라가 생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의 공동재산인 지하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물을 조달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코카콜라사는 케란라 주정부를 상대로 물부족은 가뭄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우타프라데쉬 지역에서는 코카콜라 공장이 들어선 뒤 지하수 수위가 최소 15피트에서 최대 40피트까지 내려갔다고 조사되었다.
테인주의 쿠더스 마을에서는 코카콜라가 강에서 공장까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자 그것을 으려는 마을 사람들과 파이프라인을 지키려는 경찰간의 숨박 꼭질이 벌어지고 있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한 타밀라두에서도 코카콜라는 하루 7만 5천리터나 되는 물을 뽑아가고 있다.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코카콜라 공장 정문에서 시위를 하다 다치고 구속되고, 집단 단식까지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인도의 과학환경센터(CSE)는 펩시와 코카콜라가 생산하는 12개 음료수를 조사한 결과 살충제인 말라티온과 발암물질함유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과학환경센터는 일부 음료수에 유럽연합(EU) 안전치를 각각 30배, 36배 초과하는 살충제 성분검출됐다고 발표하면서, 먹는 물에 대한 수질규제가 없는 인도에서 펩시와 코카콜라가 이점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살충제 콜라 파문은 인도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콜라 불매운동에 불을 붙였다.
몇몇 인도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킬러콜라(killer cola)' 라 부른다.

사실 코카콜라사는 인도에서 콜라만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생수 시장에도 진출했다.
인도의 보통 식당에서 탈리 정식이 25루피라면 코카콜라사가 만든 1리터 짜리 생수 킨레이(KINLEY) 한 병이 18루피다.
인도의 지하수를 리터당 1센트도 채 인되는 값에 사들여서느 약간 정수처리를 한 뒤 플라스틱 병에 담아 몇 배나 비싼 값으로 되파는 것이다.
코카콜라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인도 작은 마을의 투쟁을 넘어 지구의 소중한 물을 '코카콜라' 로부터 지키기 위한 국제적인 연대호소하고 있다.
환경에 관한 자료를 해마다 조사, 발표해 온 월드워치 연구소는 2004년 '지구환경보고서' 에서 환경오염을 상징하는 6가지 물건 중 하나로 지하수를 끊임없이 뽑아내는 청량음료로 꼽았다.

사실 물이 흔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인도 사람들의 코카콜라에 대한 저항은 먼 나라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촌 물 문제는 이미 급박한 상황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변기 물을 한번 내리는 야(13리터)은 개발도상국에서 평균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씻고 마시고 청소하고 요리하는데 는 양(7.6리터)과 맞먹는다.
물 문제의 심각성은 '당신의 오줌이 세계 11억 명이 매일 마시는 물보다 깨끗하다' 라는 국제환경단체의 포스터 문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더욱더 큰 문제는 물이 다국적기업의 치부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100대 기업에 물장사를 하는 프랑스 다국적기업 수에즈와 비벤디가 들어가 있다.
수에즈, 비벤디 그리고 독일의 에르붸에(RWE)는 150개 국가, 3억 명에게 물을 공급하고 있다.
물 대기업들이 한해 2천 억 달러(약 3백20조 원)이윤을 남기는 반면, 이들에게 물 공급원을 넘긴 나라들은 갑자기 인상된 물 값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볼리비아의 수돗물 공급권은 벡텔이 인수하면서 세배 상승했고, 프랑스에서는 민영화된 뒤 수도요금이 150퍼센트, 잉글랜드에서는 106퍼센트나 올랐다.
인도의 일부 가정은 수입의 25퍼센트를 물을 사용하는데 지출해야 한다.
요하네스버그의 흑인 빈민 밀집지역 알렉산 드라에서는 수도 요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 공급이 갑자기 중단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콜레라와 설사시달리고, 심지어 목숨을 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마춥루 주민들은 살인적인 수돗물 값을 견디다 못해 다시 강르로 가서 물을 길어먹고 있는데, 물을 뜨러가는 아이들이 악어세 물려죽는 일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감히 인도인들처럼 함께 코카콜라에 저항하자고, 코카콜라 불매운동에 동참하자고 호소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가끔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을 때, 변기 물을 내릴 때 한번씩은 되뇌어보자.

"물아, 너 어디서, 어떻게 왔니? 또 어디로 갈거니? 너는 누구의 것이지?"



【水とコカコーラが戦う】
    
文 イ・ユジン(環境運動家)

全世界をひっくるめて一日に売れるコカコーラは10億杯。
10秒ごとに世界12万6千人がコカコーラを飲んでいる。
1886年アメリカアトランタの薬剤師だったジョンペンバトンが頭痛を和らげる応急として作り出したコカコーラは今日ブランドの価値としてだけで705億ドル、世界1位に達している。

"地球上で一番孤立された場所だと言うとしてもコカコーラはいつもその場所にいます。"というキャッチフレーズが言うようにコカコーラは世界200あまりの各国で販売されている。
世界を牛耳るアメリカの軍事的、経済的力と共にコカコーラは20世紀アメリカ文化のシンボルになった。
それで世界の市民たちは行き過ぎなあめりかの産業主義帝国主義に対する反感を ' アンチ-コカコーラ ' キャンペーンを通して表したと言う。
最近イラク戦と関連してフランスとイスラムを中心に ' メカコーラ ' 、' アラブコーラ ' が飛ぶように売れている現象と韓国で冬季オリンピックの小野選手の反則歯向かうアメリカ製品の不買運動の象徴としてコカコーラが標的になっていたのも同じ理由からだ。

しかしインドでは生存のたけめを掛けてコカコーラに抵抗する人々がいる。
インド南部のプラチマダ村は代表的なコカコーラの抵抗地だ。
ここでコカコーラが地下水管8個を貫通して地下水を勢いよくくみ上げた結果、土地が荒廃して砂漠化が進行されている。
畑がひやがって、青い葉のやししおれていっている。
住民たちは ' コカコーラ工場が日に日に100万ℓ ㍑ もなる地下水を盗んでいる ' と主張する。
100万ℓ ㍑ なら2万人が一日生活できる量だ。
村の住民たちにコカコーラは酷い"水泥棒"と言うわけだ。
1998年コカコーラ工場が出来た後で村の女性たちは毎日5km ㌔ もはなれたほかの村まで水を汲み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不足は言うまでもなくコカコーラ工場で出た汚染のために全ての井戸が飲み水として飲むのに不適と言う結果まで出た。
村の人々をもっと怒らせたことはコカコーラ社からコカコーラを作って出たカスを農夫たちにたい肥の名目で提供したがそのカスの中にカドミウムのような毒性物質が出たのだ。
約2千人のデモ隊がコカコーラ工場に押し寄せて行き工場閉鎖を要求し、コカコーラ社を相手に地下水をめぐる訴訟をはじめた。
結局2003年12月ケララ州の高等裁判所ではコカコーラが生産活動をするためには地域住民たちの共同財産の地下水ではなく他の方法で水を調達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判決を下した。
しかし依然としてコカコーラ社はケララ州政府を相手に水不足は日照のせいだと抗弁している。

ウタフラデ市地域ではコカコーラ工場が出来た後地下水の水位が最小15feetから最大40feetまで下がったと調査された。
テイン州のクドス村ではコカコーラが川から工場までパイプラインを建設するとそれをさえぎろうとする村の人々とパイプラインを守ろうとする警察の間でいたちごっこが広がっている。
インド全体をひっくるめて水不足問題が深刻なタミルラトでもコカコーラは1日7万5千ℓ ㍑ もなる水を抜いている。
"神聖なる都市"バラナ市でも村の全ての人々がコカコーラ工場正門でデモをしていて怪我をして拘束され集団断食までしている。

昨年8月インドの科学環境センター(CSE)はペプシとコカコーラが生産する12個の飲料水を調査した結果殺虫剤のマルラティオンと発ガン物質が含有されていると発表した。
科学環境センタへは一部飲料水にヨーロッパ連合(EU)の安全値をそれぞれ30倍、36倍超過する殺虫剤の成分が検出したと発表しながら、飲み水に対する水質規制がないインドでペプシとコカコーラがこの点を悪用していると主張した。
殺虫剤コーラの波紋はインド全域に広がりながらコーラ不買運動に火をつけた。
何人ものインド人たちはコカコーラを"キラーコーラ"と呼んだ。

事実はコカコーラ社はインドでコーラだけ作って売るのではなくミネラルウォーター市場にも進出した。
インドの普通の食堂でタリ定食が25ルピーならコカコーラ社が作った1ℓミネラルウォーター(KINLEY)1本が18ルピーだ。
インドノ地下水をリットル当1セントにもみたない値で仕入れては若干浄水処理をした後プラスチックボトルに入れて何倍も高い値で転売したのだ。
コカコーラに抵抗する人々はインドの小さい村の争いを超え地球の大事な水を"コカコーラ"から守るための国際的な連帯を訴えている。
環境に関する資料を毎年調査、発表して来たワールドウォッチ研究所は2004年 "地球環境報告書"で環境汚染を象徴する6種類のもの中の1つとして地下水を絶え間なく抜き出す清涼飲料を指摘した。

実際水に困らない我が国の人にインド人たちのコカコーラに対する抵抗は遠い国の話かもしれない。
しかし地球上の水問題はすでに切迫する状況まで至った。
我々がトイレの水を1回流す量(13ℓ)は開発途上国で平均1人が1日中で洗って飲んで掃除して料理するのに掛かる量(7.6ℓ)と匹敵する。
水問題の深刻性は "あなたの尿が世界11億人が毎日飲む水よりきれいだ"という国際環境団体のポスター文句を通して確認することが出来る。
さらにもっと大きい問題は水が多国籍企業金儲けの対象になっている点だ。
世界100位の企業に水の商売をするフランスの多国籍企業のスエチュとビベンディが入ってきている。
スエチュ、ビベンディそしてドイツのエルベ江(RWE)は150ヶ国家、3億名に水を供給している。
水の大企業が1年に2千億㌦(約3百20兆ウォン)の利益を得る反面、この会社に水の供給源を渡した国は突然上がった水の値のせいで大変になった。
ボルリピアの水道水の供給権はペクテルが引き受けて3倍上昇し、フランスでは民営化された後水道料金が150%、イングランドでは106%も上がった。
インドの一部の家庭は収入の25%を水に使用するのに支出しなければならない。
ヨハネスボクの黒人の貧民密集地域のアレッサンドラでは水道料金を払えない人々に水の供給が突然中断された。
結局人々は汚染された水を飲みコレラと下痢に苦しみ、 それだけでなく命を失う事もした。
南アフリカ共和国のマチュッルル住民たちは殺人的な水道水の値に我慢できなくて再び川に行って水を汲んで飲んでたが水を汲みに行く子供たちがワニにかまれて死ぬ事もある。

この文を読んでいる方々にあえてインド人のように一緒にコカコーラに抵抗しようと、コカコーラ不買運動に共に参加しようと呼びかけはしない。
ですが 時々飲んだり身体を洗う時トイレの水を流す時1回ずつは繰りかえし言ってみよう。

"水や君はどこから、どのように来たの? またどこへ行くの? 君は誰のものなの?"   




 【戻る】다투다 : 競り合う 戦う もめる
통틀다  : ひっくるめる
           통틀어 : ひっくるめて 全部で
투통 : 頭痛
덜다 : 和らげる 減らす
응급 : 応急
약사 : 薬剤師
주름(을) 잡다 : ひだを取る 折り目をつける
              주름살 : しわ
와/과 더불어 : ~と共に
상징 : 象徴 シンボル
지나치다 : 度が過ぎる 行き過ぎ 通り過ぎる 通り越す
상업주의 : 産業主義
제국주의 : 帝国主義
안티 : アンチ
캠페인 : キャンペーン
【戻る】
 불터나다 : (商品が)飛ぶように売れる
동계 : 冬季
반칙 : 反則
맞서다 : 向かい立つ 歯向かう 対立する
까닭 : 理由 原因
생존 : 生存
목숨 : 命
저항 : 抵抗
뚫다 : 開ける 貫通する
퍼내다 : くみ上げる
황폐 : 荒廃
쩍쩍 : ばくっと 
갈라지다 : 割れる 裂ける
푸르다 : 青い
시들다 : (草花が)しおれる しぼむ
【戻る】
주장 : 主張
엄청나다 : 思いもよらぬ程酷い
부족 : 不足
부적 : 不適
찌꺼기 : カス
퇴비 : 堆肥
제공 : 提供
납 : 鉛 ロウ
카드뮴 : カドミウム 
독성 : 毒性
물질 : 物質
시위대 : デモ隊
몰리다 : 一度に押し寄せる
폐쇄 : 閉鎖
둘러싸다 : 取り囲む
【戻る】
 고등법원 : 高等裁判所
조달하다 : 調達
판결 : 判決
여전히 : 依然として
가뭄 : 日照り
항변 : 抗弁
건설 : 建設
막다 : さえぎる
성스럽다 : 神聖である
구속 : 拘束
단식 : 断食
살충제 : 殺虫剤
발암물질 : 発がん物質
함유 : 含有
연합 : 連合
【戻る】
성분 : 成分
검출 : 検出
수질 : 水質
구제 : 規制
파문 : 波紋
불매 : 不買
사들이다 : 買い入れる 仕入れる
정수 : 浄水
되팔다 : 転売する
저항 : 抵抗
투쟁 : 闘争
호소 : 訴える
꼽다 : 指折り数える 指摘する
변기 : 便器 トイレ
【戻る】
편균 : 平均
들다 : 要る 掛かる 取る 食べる
맞막다 : (数量や程度) 互角
오줌 : 小便 尿 おしっこ
치부 : 財産を増やして金持ちになる
장사 : 商売 商い
공급 : 供給
이윤 : 利益 儲け
인상 : 引き上げる
수입 : 収入
지출 : 支出
흑인 : 黒人
빈민 : 貧民
밀집 : 密集
설사 : 下痢
【戻る】
시달리다 : 悩む 苦しむ
심지어 : はなはだしく それだけでなく
잃다 : 失う
공화국 : 共和国
견디다 : (物が)もつ 長持ちする 我慢する
악어 : ワニ
감히 : あえて 恐れ多くも ずうずうしくも
동참 : 共に参加すること
되뇌다 : くどくど言う 繰り返して言う


 



【2007/07/03 2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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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字も読まないでください
【이 글도 읽지 마세요!】

혼자 살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한 번씩 호흡곤란을 느낄 때마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알약을 먹고 서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했다.
그러다 결국은 어느 날엔가 혼자 쓰러져 죽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노인은 약병을 손에 꼭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약만 먹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가 약을 먹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약병 뚜껑에는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세요'란 말과 함께 뚜껑을 여는 법이 설명되어 있었다.
아들이 찾아와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 노인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누구나, 모든 사람이 글자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약병 뚜껑에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면 노인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노인이 아니라 시각장애우였다면 결과는 또 어땠을까?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자대한 생각없는 수용에 대해 살펴보자.

치료되지 않는 문자중독증

하루에 자신이 읽는 글자가 과연 몇 글자나 되는지 세어 본 적이 있는지.
집을 나서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가게의 간판, 길거리 무료정보지, 텔레비전 자막, 친구가 손전화로 보낸 문자메시지, 잡지, 광고물, 고층빌당 옥상에서 눈만 돌리면 보이는 오늘의 기사, 넘실대는 글자 글자들...자신이 취해야 할 것과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여과장치마련할 새로 없이 눈으로, 머리로 쏟아져 들어온다.
과연 이렇게 많은 것을 내가 알아야 하는 건지, 안다면 무엇이 좋아질 것인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넘쳐나는 정보들이다.

그럼 글자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살았을까?
울산에 가면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인 '암각화'를 볼 수 있다.
글자 대신 그림으로 자신들의 소망을 표현하고 후대에 오래도록 전해질 명작을 남졌다.
이집트는 파피루스에 그림을 새겨 오늘까지 그 찬란했던 문명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그도 역시 따지고 보면 일종의 그림글자이긴 하지만 자기 주변의 것들을 사용한 언어였고, 자신의 생활과 격리되지 않은 것들에 주목하는 생각이었다.
공동체에서 사냥을 나갈 때 소가 많이 잡히바라는 마음으로 소 그림을 그리고, 아이가 많이 생겨 부족의 힘이 커지기를 바라며 풍성한 여인의 몸을 그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중의 하나.
일행없이 혼자 가는 대부분의 젊은이 들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문자메시지 보내기열중하고 있다.
주위 사람도 상관없고, 어떤 풍경이 창밖으로 흘러가건 상관없이 그저 누군가에게 열심히 문자를 보낸다.
소형카세느 테이프를 들고 다니면 이어폰을 고 음악을 듣는 것이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키고 소통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새로운 세기는 모두가 혼자이게 될 것이라고 하던 게 엊그제인데, 이제는 사람들이 혼자임을 너무 두려워해서 또 문제다.
전화로 연결된 누군가에게 신경을 쓰느라 바로 의 누군가에게 늘 무심해지고 만다.
그러면서 지금도 "나 지금 집에 들어가. 버스 엄청 막혀"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조차 열심히 허공으로 뿌려대고 있는 사람들.

넘치는 정보, 넘치는 읽을거리 속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사회복지정보원에서는 정보화사회의 부작용으로 '정보자 본화, 음란정보인한 저질문화의 확산,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사생활 침해, 통신 인터넷 중독증, 빈번한 실업과 직업전화, 가족 공동체의 위기, 과다한 정보로 인한 스트레스...'를 고 있다.
또 정보시스템을 보유하는 정도나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따라 빈부격차, 사회경제 불평등은 이전보다 훨씬 심화될 수 있고 정보이용능력이 없는 사람을 무능력자로 몰아붙이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일반인비해 정복로부터 다소 격리된 상태인 장애우, 그리고 노인이나 가난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격차에 따른 장벽을 갈수록 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화기, 공중전화, 컴퓨터, 컴퓨터통신과 인터넷 등 각종 정보통신기기나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정애우는 절대적 정보약자"라는 사회복지정보원의 보고처럼 정보로 넘치는 새로운 세기가 미처 가슴으로 다 안지 못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이라는 글자가 아니고 직접 동물을 만져보는 행위 자체다.

교감하는 그 순간이다.
매체 속에서 대리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아무리 오래 들여다본다고 해도 그 마음에 아름다운 사랑이 저저절로 싹트는 것은 아니란 사실, 아는 사람은 이미다 안다.

많이 배운 사람만이, 지식(지혜가 아니라)이 아주 많은 사람만이 존경만한 사람이란 착각은 언제부터 인가 우리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
성철스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신문조차 읽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라.
당신은 문자의 노예인가, 아닌가?



 심장 : 心臓
호흡곤란 : 呼吸困難
처방 : 処方
정상 : 正常
쥐다 : 握る
자세 : 姿勢
뚜껑 : ふた
경향 : 傾向
어찌된일인고 : どうしたの
수용 : 収容
살펴보다 : よく見る
과연 : 案の定 果たして なるほど さすが
세다 : 数える 計算する
나서 : 出る
돌리다 : まわす 向ける
넘실대다 = 넘실거리다 : キョロキョロ覗き見る うねる
취하다 : 酔う 取る
여과 : ろ過
장치 : 装置
마련하다 : 準備する 計画する
쏟아지다 : 一度に多くこぼれ落ちる
넘치다 : あふれる 過ぎる 余る
선시 : 先史
소망 : 願い 望み
명작 : 名作
새기다 : 刻む 彫る
찬란하다 : きらきら
따지다 : 問う
일종 : 一種
격리 : 隔離
사냥 : 狩り
부족 : 不足 部族
커지다 : 大きくなる 広がる 成長する
풍성하다 : 豊かが多いこと
광경 : 光景 シーン
풍경 : 風景
그저 : ただ ひたすら 
그저 그렇다 : 別に変わったことない まあまあだ
소형 : 小型
단절 : 断絶
소통 : 疎通
방해하다 : 妨害 邪魔
세기 : 世紀
두려워하다 : 恐れる 心配する
엄청 : 思いもよらぬ程ひどい
음란 : 淫乱 乱れ
저질 : 低質
유출 : 流出
침해 : 侵害
및 : および
빈번하다 : 頻繁
과다하다 : 過多
꼽다 : 指を折る 指摘する
몰아붙이다 : 一方に寄せ付ける 攻め立てる
우려하다 : 憂慮
다소 : 多少
격리 : 隔離
존재 : 存在
미처 : まだ かつて そこまでは
저절로 : 自然に ひとりでに
싹트다 : 芽を吹く
노예 : 奴隷



【この文も読まないでください!】

1人で暮らしているある老人がいた。
彼は心臓病を患っていたが一回ずつ呼吸困難を感じる度に病院で処方してくれた錠剤を飲んでからまた正常に戻ったりした。
そうするうちに結局はいつの日にかある日一人で倒れて死んでしまったが、どうした事なのかその老人は薬ビンを手に握ったままの姿勢で倒れていた。
薬さえ飲んだら生きることができたかも知れない彼が薬を飲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には理由があった。
薬ビンのふたには '子供の手が触れない所に置いて下さい'と言う言葉とともにふたを開ける方法が説明されていた。
息子が尋ねて来てそれを見て涙を流したが、その老人は字を読むことができない人だったというのだ。

人々は当然誰でも、すべての人が字が分かっていると考える傾向がある。
その薬ビンのふたに字ではなく絵が描かれていたら老人は死な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話だ。
もし彼が老人でなく視覚障害者だったら結果はまたどうだったろうか?
当たり前だと思っている文字の無意識な使い方について調べてみよう。

治療できない文字中毒症

一日に自分の読む字が果して何字にもなるのか計算して見たことがあるのか。
家を出る瞬間目に入って来る店の看板、道の無料情報誌、テレビの字幕、友達が携帯で送った文字メッセージ、雑誌、広告物、高層ビルの屋上で目さえ向けれぱ見える今日の記事、うねる字 字....自分が選ばなければならない事選択してはいけないものなどに対してきちんと出来たろ過装置を準備間もなく目で、頭に多く入ってくる。
果してこんなに多くのことを私が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か、知ったら何が良くなるのかそんなこととは関係なくあふれる情報だ。

それでは字がなかった時代にはどうやって暮しただろうか?
ウル山へ行けば先史時代の岩絵の '岩刻画'を見られる。
字の代わりに絵で自分たちの願望を表現して後代に長く伝える名作を残した。
エジプトはパピルスに絵を刻んで今日までそのきらめき輝いて美しかった文明の話を伝えている。
それもやっぱり検討してみたら一種の絵文字ではあるが自分の周辺のものを使った言語だったし、自分の生活と隔離されないものに注目する考えだった。
共同体で狩りに出る時 牛がたくさんつかまるように願う心で牛の絵を描いて、子供がたくさん出来る部族の力が広がるように願って豊満な女人の体を描いた。
しかし今の私たちはどうか…

地下鉄やバスに乗ればよく見られる光景の中の一つだ。
同行者なく一人の大部分の若者たちは携帯電話を手に持って文字メッセージを送るのに夢中になっている。
周囲の人もお構いなく、どんな風景が窓の外に流れようが構わずにひたすら誰かに熱心に文字を送る。
小型ウォークマンを持ち歩きイヤホンをさして音楽を聞くのが人と人を断絶させて疎通を邪魔する行為だと、新世紀は皆がひとりになるだろうと言ったことが昨日のことのようなのに、これからは人々がひとりをとても恐れてまた問題だ。
電話で繋がれた誰かに気を使うためにすぐの誰かにいつも無関心になってしまう。
そうしながら今も "私今家に帰る。バスが思いもよらず混んでる"と言う、言っても言わなくてもいい話さえ熱心にむやみやたらしまくっている人々。

あふれる情報、あふれる読み物の中で私たちが失ったのは何か?
社会福祉情報院では情報化社会の副作用で '情報売買,、乱れた情報による低質文化の拡散、個人情報流出によるプライバシーの侵害、通信及びインターネット中毒症、頻繁な失業と職業電話、家族共同体の危機、過多な情報によるストレス...'を指摘している。
また情報システムを保有する位やそれを利用する能力によって貧富格差、社会経済の不平等は以前よりはるかに深くなることができるし情報利用能力がない人を無能力者(負け犬)として追い詰めることになるのを憂慮している。

一般人に比べて情報から多少隔離された状態である障害者、そして老人や貧しい人は自分と違う人の間に存在する情報格差による障壁を日に日に大きく感じ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誰も利用することができると考える電話機、公衆電話、パソコン、パソコン通信とインターネットなど各種情報通信器機やサービスを利用することができない障害者は絶対的情報弱者"という社会福祉情報院の報告のように情報であふれる新世紀をまだ受け止められない人々も確かに存在する。

だから, 重要なことは '動物'という字ではなくて直接動物を触って見る行為自体だ。
交感するその瞬間だ。
媒体の中で代りに満足するのではなく自分の体で体験するのが重要だ。
'愛'という字を書いておいていくら長く見るとしてもその心に美しい愛が自然芽が吹かない事実、知っている人はすでに知っている。

たくさん学んだ人だけが、知識(知恵ではなく)がとても多い人だけが尊敬するに値する人と言う錯覚はいつからだか我々全てを辛くさせている。
ソンチョルのお坊さんは自分の弟子たちに新聞さえ読まないようにしたと言う。
今この文を読んでいる自分を振り返りなさい。
あなたは文字の奴隷か、そうじゃないか?
【2007/06/18 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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爆弾酒
체면치레에 약한 당신의 마음을 파고든다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전자신문 <뉴스프로스>가 검사 395명과 일반 직원 15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검사의 70.6%, 직원의 51.8%가 폭탄주가 단합유도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인다고 답했다.
<연합뉴스 4월1알자 보도>

폭탄주의 인기가 을 줄 모른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폭탄주는 정치인,법조인, 경제관료, 언론인 등 특정직업군에서만 즐기던 '술 문화'였다.
그들만의 술로 인정 받았고, 일반인들은 '별난' 술로 생각해 마시길 꺼렸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폭탄주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직장 회식에서는 물론이고, 친한 지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소위 '폭탄을 말아 먹는' 행위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학생까지...사회 전반으로 '폭탄' 번져

'Why?' 팀은 한 교양과목을 수강 중인 서울대 학부생 70명을 대상으로 폭탄주를 마셔본 적이 있는지 설문조사했다.
이 설문에서 '그렇다'고 응답한 학생은 52명(74%).
이중 38명(73%)은 신입생 시절 처음 폭탄주를 접했고, 9명(17%)은 중.고등학새 때부터 폭탄주를 마셨다고 답했다.
폭단주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답한 학생은 18명에 불과했다.

폭탄주를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는 36명(69%)이 "술 자리 분위기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기 때문", 7명(13%)이 "단합과 공동체 의식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일반 직장인들도 마찬가지.
2005년 대기업 A사에 입사한 3년 차 직장인 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전원이 폭탄주를 마셔본 경험이 있었다.
마시는 횟수도 '1주일에 한 번 이상'이 8명, '1주일에 한 번 정도' 12명, '2주일에 한 번 정도' 23명, '한 달에 한 번 정도' 10명에 달했다.

폭탄주의 가장 큰 특징은 취하는 '속도'에 있다.
실상 폭탄주 한 잔에 포함된 알코올 함유량은 소주 한 잔과 별반 차이가 없다.
54ml 소주잔에 20도 소주 50ml를 따르면 10ml의 알코올이 포함된다.
반면 30ml 위스키잔에 40도 도수의 위스키를 절반 붓고 250ml 맥주잔에 4.5도 맥주 절반을 부어 섞는 폭탄주의 경우, 알코올 함량은 11.625ml가 된다.
계산상으로는 폭탄주 한잔이 소주 한잔의 알코올 농도보다 조금 더 셀 뿐이다.

그런데도 소주나 맥주를 따로 마시는 것보다 취기를 느끼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그 이유는 맥주에 포함된 탄산가스가 위에서 도수 높은 양주나 소주를 빠르게 흡수토록 돕기 때문이다.
대장에서 흡수되는 물과 달리, 맥주의 탄산가스는 위에서부터 스며들어 고알코올의 흡수를 돕는다.

"나만 안마실 수야...." 허깨비 같은 집단의식

전문가들은 폭탄주 확산 현상을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바로 한국인의 '체면치레', 즉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는 관습화된 의식이 폭탄주 확산의 주범이라는 분석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전체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 거부하면 전체에게 부담을 줄 지 모르는 일이라면 묵묵히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며 "자신에게 폭탄주가 왔을 때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선호를 분명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주위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습성 때문이다"고 말했다.

조급한 음주문화에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김춘식 교수는 "회식 자리나 어색한 분위기에서 술 없으면 대화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빠른 시간 내에 형식과 격식을 깨뜨리고 집단의식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기 위해 폭탄을 마시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폭탄주 애호가들은 "폭탄주를 통해 사회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2001년 9.11 테러 당시에는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것을 본 떠, 폭탄주 두 잔을 나란히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폭탄주 1잔을 올려놓는 '테러주(빈라덴주)'가 유행했다.
2002년 월드컵 시기, 맥주잔 위에 놓인 젓가락 두 개를 발로 걷어차 양주잔을 떨어뜨리는 '월드컵주'가 인기였다.
이런 까닭에 폭단주를 '현실 반영'의 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남성심병원 가정의학과 노용균 교수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간이 무리하지 않고 분해할 수 있는 하루 알코올 섭취 최대량은 80g"이라며 "4도의 500ml 맥주 한 잔의 알코올 양이 20g(500x0.04)인데 여기에 폭탄주를 만들어 마신다는 것은 '말 못하는' 간을 혹사시키는 행위"하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체면 : 対面 面目 
치레 : 装い 見かけばかり装うこと
체면치레 : 世間体
파고든다 : 深く中に入り込む
대검찰청=대검 : 検察庁
발행 : 発行
검사 : 検事
단합 : 団結 団合
유도 : 誘導
공동체 : 共同体
식다[식따] : 冷める 薄れる 冷える
정치 : 政治
법조 : 法
언론[얼론] : 言論
특정 : 特定
즐기다 : 楽しむ 好む
인정 : 認定
별난[별란] : 変な
꺼리다 : 嫌がる 嫌う 渋る 避ける
확산 : 拡散
행위 : 行為
새삼스럽다 : 今更のようだ 今更でもない
수강 : 受講
총 : 計
접하다[저파다] : 接する ぶつかる 触れる 
횟수 : 回数
달하다 : 達する 至る
특징 : 特徴
실상 : 実状
함유량[함뉴냥] : 含有量
별반 : (아니 / 없다 / 못하다 / 모르다 と一緒に用いて)さして とりわけ
따르다 : 注ぐ
흡수 : 吸収
스며들다 : 染み込む
허깨비 : 幻
집단 : 集団
전문 : 専門
측면[층면] : 側面
접근[접끈] : 接近
주범 : 主犯
분석 : 分析
거부 : 拒否
묵묵히[뭉무끼] : 黙々と
수행 : 遂行
경향 : 傾向
선호 : 選り好み
드러내다 : 目立たせる あらわにする
어색하다 : 気まずい
조급: 急速
깨뜨리다 : 壊す
활성 : 活性
무너지다 : 崩れる 倒れる
나란하다 : きちんと並んでいる
나란히 : 並んで
걷어치다 : 蹴飛ばす
떨어뜨리다 : 落とす
까닭 : 理由 訳 原因
반영: 反映
분해 : 分解
섭취 : 摂取(せっしゅ)
혹사 : 酷使(こくし)
본뜨다 : まねる


世間体に弱いあなたの心に入り込む

最高検察庁が発行する電子新聞 <ニュースプロス>が検事 395人と一般職員 1570人を対象にアンケート調査を実施した結果 検事の 70.6%, 職員の 51.8%が爆弾酒が団合を誘導して共同体意識を高めると返事した。
<連合ニュース 4月1日付け報道>

爆弾酒の人気が冷めないだろう。
国内に初めて紹介された 1980年代初盤にはまだ爆弾酒は政治家、法律家、経済官僚、言論人など特定職業群にだけ楽しんでいた '酒文化'だった。
彼らだけの酒として認められて、一般人たちは '変な' お酒だと思って飲むのをさけた

しかし 20年余りが過ぎた今、爆弾酒は社会全般で広がっている。
職場の会食ではもちろん、親しい知人どうし集まった席でも いわゆる '爆弾を掛けて食べる' 行為今更でもないことではない。

大学生まで...社会全般に '爆弾' 拡散

'Why?' チームはある教養科目を受講中のソウル大 学部生 70人を対象に爆弾酒を飲んだことがあるかアンケート調査した。
このアンケートに 'そうだ'と回答した学生は 52人(74%).
この中 38人(73%)は新入生時代初めて爆弾酒を飲んで、9人(17%)は中.高校の時から爆弾酒を飲んだと答えた。
爆弾酒を飲んだことがないと答えた学生は 18人に過ぎなかった。

爆弾酒を飲む理由に対しては 36人(69%)が "お酒の席を盛り上げるため", 7人(13%)が "団合と共同体意識のため"と答えた。

一般会社員たちも同じだ。
2005年大企業 A社に入社した 3年目の会社員 53人を対象に調査してた結果、全員が爆弾酒を飲んだ経験があった。
飲む回数も '1週間に一回以上'が 8人, '1週間に一回位' 12人, '2週間に一回位' 23人, '一月に一回位' 10人に達した。

爆弾酒の最大の特徴は酔う '速度'にある。
実際爆弾酒一杯に含まれたアルコールは焼酒一杯とさほど差がない。
54mlの焼酎グラスに20度の焼酒 50mlを注げば10mlのアルコールが含まれる。
一方 30mlのウイスキーのグラスに40度のウイスキーを半分注いで 250mlのビールジョッキに 4.5度ビール半分を注いで混ぜる爆弾酒の場合、アルコール量は 11.625mlになる。
計算上では爆弾酒一杯が焼酒一杯のアルコール濃度より少し強いだけだ。

それなのに焼酒やビールを別々に飲むより酔いを感じる速度がはるかに早い。
その理由はビールに含まれた炭酸が胃で度数の高い洋酒や焼酒を早く吸収するように助けるからだ。
大腸で吸収される水と違い、ビールの炭酸は胃から染みこんで高アルコールの吸収を助ける。

"私だけ飲まない訳には...." のような集団意識

専門家たちは爆弾酒の拡散の現象を文化的な側面から接近する。
まさに韓国人の '世間体', すなわち他人に自分を合わせようとするしきたり意識が爆弾酒の拡散の一番の理由という分析だ.

延世大心理学科 ファンサンミン教授は "我が国の人々は本人が望まない事でも全体のため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事、拒否すれば全体に負担を与えるかも知れない事なら黙って(黙々)遂行する傾向がある"として "自分に爆弾酒が来た時 拒否できないのは本人の好みをはっきり現わすよりは周りの人たちが当然だと思うやり方で行動する習性のためだ"と言った。

せっかちな飲酒文化に原因もある。
韓国外大言論情報学部 金チュンシク教授は "会食の席やぎこちない雰囲気でお酒なければ話のないことが我々の現実"として "早い時間内に形式と格式を破って集団意識で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活性化するために爆弾酒を飲むようになる"と言った。

一方爆弾酒愛好家たちは "爆弾酒を通じて社会を読める"と言う。
2001年 9.11 テロ当時にはニューヨーク双子ビルが崩れたのをまねて、 爆弾酒2杯を並んでおいてその上にまた他の爆弾酒 1杯を上に置く 'テロ酒(ビルラデン酒)'が流行った。
2002年ワールドカップの時、ビールジョッキの上に置かれた箸2つを足で蹴飛ばして洋酒グラスを落とす 'ワールドカップ酒'が人気だった。
こんなわけで爆弾酒を '現実の反映'のお酒だと呼んだりする。

江南精神病院家庭医学科 ノヨンギュン教授は "人によって違いはあるが肝臓が無理しないで分解することができる一日のアルコール攝取の最大量は 80g"だとし "4度の 500ml ビール一杯のアルコール量が 20g(500x0.04)なのでこれに爆弾酒を作って飲むということは '話せない' 肝臓を酷使させる行為"と言った。

金ヨンミン 記者
【2007/06/05 2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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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宿物語③
【신주쿠 모노가타리③】

말하자면 수많은 일본인등의 표현대로 사람 사는 것 같은 동네를 만난 것이다.
덕분에 남대문시장에 이어 90년대 중반부터는 동대문시장이 일본인들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다.

그렇다고 이 같은 현상이 '88서울올림픽'이라는 대 이벤트가 공짜로 가져다 준 보너스는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본인,특히 지한파 여배우인 구로다 후쿠미,오카마 가수 미카 등 일본 연예인들의 활약이 대단히 컸다.
아마도 이때가 한국 음식문화의 분기점이 아니었나 싶다.

뿐만 아니라즈음에 국내에서는 87년 해외여행 자율화가 전면적으로 시행됐다.
그러자 그 동안 까다로운 자격심사로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일반 서민들이, 너도나도 경쟁하듯이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서도 청운의 뜻을 고 학문목적으로 일본에 온 기존의 유학파들과는 달리, 그저 단순히 어학 연수를 위해 일본에 오는 유학생이 급증하면서 일본 내 한국인들의 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특히 80년대 일본경제가 세계를 평정하면서 덩달아 엔화도 높아져, 돈벌이를 위해 일본에 오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88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인의 해외여행 자율화, 그에 따른 한국유학생 급증, 그리고 일본매스컴의 대대적인 한국관련 보도가 삼위일체가 되어 이른바 '한국음식 붐'을 낳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한 때 때를 미는 이태리 타올이 선풍적인 인기를 적이 있었다.
앞에서 말한 구로다 후쿠미와 미카 같은 일본연예인 리포터들이 직접 한국에 가 한국식 때를 밀어 보고는, 너무 좋다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대대적인 선전을 하는 바람에, '아카쓰리 투어'가 한동안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나 자신도 당시 서울에 갈 때마다 3-5백 여장의 이태리 타올을 사서 일본인 지인들에게 나눠 준 적이 있었다.
그러면 일본인 친구들은 다른 선물보다도 대단히 기뻐했다.
지금은 그 메뉴가 김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88서울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일컬었던 한일관계가 이 때부터 '먼 나라'라는 의미가 조금씩 퇴색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관 차원의 한일교류가 많았지만, 88년 이후부터는 민간차원의 교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일정부분 보이지 않는 반목의 한일관계가, 어느 사이 이웃사촌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역사적인 한일관계사는 제외하곤 말이다.
한편, 신주쿠에도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났다.

80년대 초만해도 드문드문 재일동포들만이 눈에 띄던 신주쿠거리가, 90년 들어 어느 사이 본국에서 건너 온 한국인들의 모습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특히 가부키초, 쇼쿠안도리에 하나 둘씩 한국식당과 코리언 크럽 등이 늘어나면서, 이에 관련된 한국식품점, 미장원 등이 구색갖추어 작은 한인타운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쇼쿠안도리에서 가장 큰 식품점인 '광장'도 사실은 이 즈음에 생겨난 것이다.
한국식당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 한국식품 전문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바로 이 틈새 시장을 비집고 들어 와 대성공을 거둔 것이 한국대형 수퍼 '광장'이다.

이렇듯 한국식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식품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또한 코리언 크럽 언저리에는 미장원, 의상실, 사우나탕, 비다오 대여점이 똬리를 틀었다.
뿐만 아니라 주머니 사정이 얇은 한국인을 위한 한국 이자카야도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가부키초나 쇼쿠안도리를 지나는 행인들 중, 서너 사람건너 한국사람이랄 정도로 실제로 한국사람끼리 어깨를 부딪치는 일이 흔했다.

그런 만큼 문제도 많이 발생했다.
한국인 특유의 근성, 즉 세계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한인사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병폐, 같은 나라 사람끼리 일어나는 불협회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 引き続き 続いて
명소 : 名声
지한파 : 信韓派
활약 : 活躍
분기점 : 分岐点
즈음 : 頃 時 おり
까다롭다 : 気難しい 厳しい ややこしい 複雑
경재 : 競争 
몰리다 : 一度に押し寄せる
청운 : 青雲
품다 : 抱く 含む 続けざまに
기존 : 即存
그저 : ただ ひたすら ほんの 単に
급증하다 : 急増する
평정 : 平定
덩달아 : 続く つながる
다시 말하다 : 言い換えれば
따르다 : 従う ついて行く 
관련 : 関連
이른바 : いわゆる
일체 : 一体 すべて
때를 밀다 : 垢(あか)を落とす
선풍 : 旋風
끌다 : 引く 引っ張る
선전 : 宣伝
일컬다 : 呼ばれている
퇴색 : 色あせる
차원 : 次元
일정 : 一定
제외 : 除外
드문드문 : ときどき たまに ちらほら ぽつりぽつり
넘치다 : あふれる
구색 : 取り合わせ
갖추다 : (物を)備える 整える
틈새 : すき その間
비집다 : こじあける かき分けてはいる
거두다 : 取り入れる 収める
우후죽순 : 雨後のたけのこ
언저리 : あたり 周囲
대여 : 貸し下げ
뙤리 : 蛇のどくろの様子 集まっている
주머니 : ポケット ふところ
얇다 : うすい (人の行動が)かるい
행인 : 行人
부팆치다 : ぶつかる 
발생하다 : 発生する
병폐 : へいがい
불협화음 : 不協和音
어느 사이 = 어느새 : いつの間にか


【新宿物語③】

言わば数多いの日本人たちの表現どおり生き生きした街に会ったのだ。(街を発見したのだ)
おかげで南大門市場に続き90年代中盤からは東大門市場が日本人たちの新しい名所として登場した。

それでもこのような現象が'88ソウルオリンピック'という大イベントがただで持って来てくれたボーナスでは決してなかった。
そのようになるまでには私たちが知らない日本人,特に信韓女優である黒田福美,オカマ歌手美川など日本芸能人たちの活躍がすごく大きかった。
たぶんこの時が韓国食文化の分岐点ではなかったかと思う。

だけでなくこのに国内では87年海外旅行自由化が全面的に施行された。
するとその間厳しい資格審査で海外旅行が難しかった一般庶民たちが、誰もが(猫も杓子も)競うように地理的に韓国と一番近い日本で押し寄せた。

その中でも青雲の志を抱いて学問目的として日本へ来たの留学たちとは違い、ただ単に語学研修のために日本へ来る留学生が急増しながら日本内の韓国人たちの数も増えた。

特に80年代の日本経済が世界を治めながらついでに円貨も高くなって、お金儲けのために日本へ来る韓国人たちも少なくなかった。
言い替えれば88ソウルオリンピックをきっかけに韓国人の海外旅行自由化、それに伴う韓国留学生の急増、そして日本マスコミの大大的な韓国関連の報道が三位一体となっていわゆる'韓国食ブーム'を生んだのだ。

それだけか.(ただそれだけであろうか)

80年代末で90年代中盤まで一時垢を落とすイタリアタオルが旋風的な人気を呼んだことがあった。
前で言った黒田福美と美川みたいな日本芸能であるリポーターたちが直接韓国へ行って韓国式垢すりをして見ては、とても良いとテレビに出て大々的に宣伝をするせいで、'アカスリツアー'がしばらく人気を呼んだことがあった。

実際に私自身も当時ソウルへ行く度に3-5百枚余りのイタリアタオルを買って日本人の知人たちに配ったことがあった。
すると日本人の友達は他のお土産よりもすごく喜んだ。
今はそのメニューが海苔に変わったということだが。

とにかく88ソウルオリンピックの前までにしても '近くて遠い国'と呼ばれていた韓日関係がこの時から'遠い国'という意味が少しずつ色あせ始めた。
過去には管レベル(次元)の韓日交流が多かったが、88年以後からは民間次元の交流が目に見えて(目立つように)増えた。
そうしてみると一定部分見えない反目の韓日関係が、いつの間にか隣近所に変わっていた。
もちろん歴史的な韓日関係は除いてって事だ。
一方、新宿にもすごく大きい変化が起きた。

80年代初はまだちらほらと在日韓国人たちだけが目立っていた新宿の通りが、90年に入っていつの間にか本国から渡って来た韓国人たちの姿であふれ始めた。
特に歌舞伎町、職安通りに一つ二つずつ韓国料理屋とコリアンクラブなどが増えながら、 これに係わる韓国食品店、美容室などが品を取り揃えて小さなコリアンタウンを作り始めたのだ。
現在職安通りで一番大きい食品店である'広場'も実はこの頃にできたのだ。
韓国料理屋が多くなっているから自然と韓国食品専門店が絶対的に必要だった。
まさにこの間の市場をかきわけて入って来て大成功を収めたのが韓国大型スーパー '広場'だ。

このように韓国料理屋を中心にその周辺には多様な食品店が雨後の竹の子に立ち入ったし、またコリアンクラブの周囲には美容室、衣裳室、サウナ、レンタルビダオ店が集まってる。(出来た)(とぐろを巻いた)
だけでなくふところが寂しい韓国人のための韓国居酒屋もできた。
そうしたら歌舞伎町や職安通りを行き交うたちの中、3.4人に1人が韓国人というほど実際に韓国人どうし肩をぶつける事がよくあった。

そのぶん問題もたくさん発生した。
韓国人特有の根性、すなわち世界のどの国を問わず韓国人がたくさん集まる韓人社会に共通的に現われる弊害、同じ国どうし起きる不協会音がまさにその場所だ。
【2007/05/26 1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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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宿物語②
【신주쿠 모노가타리②】

80년대 중반, 한국요리를 위한 재료를 사려면 다케야 뒷골목에 있는 제일식품점 등 재일동포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요즘에 도쿄도 어느 지역을 가도 흔히 눈에 띄는 게 한국식품점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재일동포들이 운영하는 몇 개의 식품점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에노에만 몰려 있어서 당시 유학생들이나 주재원들은 연휴나 명절 때가 되면 일부러 우에노에 가 한국식품들을 구입하곤 했다.
값도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싸서, 때로는 말만 잘하면 소 뼈 같은 것은 공짜로 얻을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은 소 뼈를 우려내서 곰탕 수프 만드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외식선호도에서도 한국음식을 대표하는 야쿠니쿠가 요즘처럼, 외식메뉴 인기 넘버원을 차지하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만 보면 마늘 냄새와 김치냄새가 난다고 전철 안에서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일본인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유학생들은 토요일이 휴일인 금요일 저녁에나 마음대로 김치를 먹었다.
특히 집에서 김치를 담글 때면, 발효과정에서 나는 김치 냄새 때문에 주변의 일본인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해 눈치를 보느라 맘 고행을 한 한국인들이 많았다.

실제로 나 자신 8년 동안 살았던 시모다카이도의 아파트에서 옆집 사람들이 김치를 좋아하기까지 무려 2년의 세월이 걸려야 했다.
왜냐하면 김치를 담근 그 이튿날부터 옆집 사람들이 아파트 구석구석 냄새제거 스프레이를 뿌리는 것은 기본이요, 혹여 김치 찌개를 끓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옆집의 창문이 부서져 나갈 듯 열었다 닫았다 격렬어필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던 것이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덩달아 한국음식에 대한 관심과 이미지도 달라져 갔다.

우선 가장 큰 변화가 일본인들의 외식문화였다.

80년대는 일본인에게 있어 '황금시대' 즉 일본경제가 한 때 세계 1위에 올랐을 만큼 '선진대국''경제대국'으로 불리 우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후 일본인들은 바블 경제 붕괴로, 90년대를 가리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자조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인들은 조금만 현금이 있어도 홍콩을 비롯한 미국 등지에 땅을 사기에 바빴다.
바로 이 같은 여유 때문이었까?

88올림픽을 계기로 높아진 한국인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한국음식으로 이어져, 야키니쿠가 일본인들의 외식선호 1위에 올랐고, 덩달아 진로 소주, 김치가 야키니쿠 세트음식이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야키니쿠를 먹을 때는 필수적으로 마셔야 하는 것이 ‘진로소주’였고, 또한 반찬으로는 김치를 곁들여 먹어야 한다는 인식이 대단히 강했다.
누가 일부러 정한 것도 아닌데도 이 같은 등식은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덕분에 진로소주는 다른 주류업체보다 <별다른 발 품팔지 않고 이 같은 일본인들의 의식변화로 인해 일본소주시장을 무난하게 평정할 수가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진로소주 저팬 사원의 노고를 기반으로 해서 말이다.

반편 김치는 이 때를 계기로 일대 대 혁명이 일어났다.
사실 이 때만 해도 도쿄에 있는 한국식당들은 재일동포들이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매콤하고 칼칼한 한국 오리지널 김치 맛이 아닌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달착지근하게 ‘일본현지화’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혀끝은 우리 한국인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호기심이 많았다.
88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약2년 전부터, 일본의 매스컴이 한국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홍수처럼 쏟아내면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남대문 시장이 일본인들의 시선을 사로 잡은 것이다.

땀냄새, 사람냄새, 살아있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남대문시장에 대한 일본매스컴의 대대적인 보도는 곧바로 일본인들의 발길을 그 곳으로 향하게 했고, 당연한 현상이지만 일본인들의 혀끝을 한국음식이 뜨겁게 달궈 주었다.
이를테면 한국 붐과 더불어 한국음식이 일본인들의 인기 식품이 된 것이다.
또한 '싸요,싸요 싸!'하고 외치는 남대문시장의 생생하고도 적나라한 호객행위는, 죽은 도시와도 같이 정해진 시스템사회에 길들여진 일본인들의 구미를 바짝 당기게 했다.


몰리다 : 一度に押し寄せる
주재원 : 駐在員
우려내다 : (物を水にひたして)味をとる
선호 : 選好 選り好み
차지 : 分け前 占める
노골(적) : 露骨(的)
찡그리다 : しかめる ひそめる
부지가수 : その数を知らぬほど非常に多いこと
발효 : 発酵
주변 : 周辺
이튼날 : あくる日 翌日
구석구석 : 隅々
제거 : 除去
뿌리다 : 撒く 振り掛ける 振り撒く
부서지다 : 壊れる 砕ける
격렬하다 : 猛烈だ 激しい 
고조되다 : 高まる
황금 : 黄金
붕괴 : 崩壊
자조 : 自助的
곧바로 : 直ちに
이어지다 : つながる 続く 
참으로 : 誠に 本当に
곁들이다 : 添えて 盛り合わせる
정하다 : 定める 決める
등식 : 等式
여전히 : 依然として
업체 : 業者
무난하다 : 無難だ
평정 : 平定 確約
노고 : 苦労


【新宿物語②】

80年代中盤、韓国料理のための材料を買おうとすればタケヤの裏通りにある第一食品店など在日韓国人たちが運営する店を訪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このごろには東京都のどの地域に行ってもよく目立つのが韓国食品店だがその頃はまだ在日韓国人たちが運営するいくつかの食品店しかなかった。
それも上野にだけ集まっていて(殺到)していて当時の留学生たちや駐在員たちは連休や節日の時になればわざわざ上野へ行って韓国食品を購入したりした。
値段も今とは比較にならないほどに安くて、時には言葉が上手ければ牛骨のようなものはただで貰う時が多かった。
何故ならば当時はまだ日本人たちは牛骨でだしをとってコムタンスープを作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からだ。

また日本人たちの外食選びでも韓国料理を代表する焼肉がこのごろのように、外食メニュー人気ナンバーワンを占め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
だけでなく韓国人さえ見ればニンニクにおいとキムチにおいがすると電車の中で露骨に顔をしかめる日本人たちも多かった。
それで留学生たちは土曜日が休日の金曜日の夕方にでも思う存分キムチを食べた。
特に家でキムチをつける時ならば、醗酵過程で出るキムチにおいのため周辺の日本人たちが露骨に嫌やがって様子を見るのに気苦労した韓国人たちが多かった。

実際に私自分8年の間住んでいた下高井戸のアパートで隣の家の人々がキムチを好きになるまでなんと2年の歳月が掛かった。
何故ならばキムチをつけたその明くる日から隣の家の人々がアパートの隅々まで匂い除去スプレーを振り撤くことは基本であり、もしキムチチゲを作るとかする日なら隣の家の窓が壊れるように開けたり閉めたり激しいアッピールをすることが普通だった。
そうだったのが88年ソウルオリンピックをきっかけに韓国に対する関心が高まりながら、韓国食に対する関心とイメージも変わって行った。

まず最大の変化が日本人たちの外食文化だった。

80年代は日本人にとって'黄金時代'すなわち日本経済が一時世界1位に上がった位'先進大国''経済大国'と呼ばれた時代だった。
もちろんその後日本人たちはバブル経済崩壊で、90年代を指して'忘れてしまった10年'と自助的に呼んでいるが、しかし当時日本人たちは少しだけ現金があっても香港を初めとしてアメリカなどの地に土地を買うのに忙しかった。
まさにこのような余裕だったからか?

88オリンピックをきっかけで高くなった韓国人に対する関心は直ちに韓国料理につながって、焼肉が日本人たちの外食ランキング1位に上がったし、続いてジンロ焼酒、キムチが焼肉のセットの食べ物になった。
本当に不思議なのが、日本人の意識の中にはいつからなのか分からないが、焼肉を食べる時は必ず飲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が'ジンロ焼酎’だったし、またおかずにはキムチを添えて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認識がすごく強かった。
誰がわざわざ決めたのでもないのにこのような等式は今も依然として通用している。
おかげでジンロ焼酎は他の酒類業者より特に他に苦労せずこのような日本人たちの意識変化によって日本焼酒市場を無難確約することができた。
もちろん基本的にジンロ焼酎ジャパン社員の苦労を基盤としてと言うことだ。

一方キムチはこの時をきっかけで一大大革命が起きた。
実はこの時にはまだ東京にある韓国料理屋は在日韓国人たちの運営する所が大部分だった。
そのためかやや辛くヒリヒリした韓国オリジナルのキムチ味ではない日本人たちの口に合うように甘辛く‘日本現地化’になっていた。
しかし日本人たちのは韓国人が思う以上に好奇心が高かった。
88ソウルオリンピックが開催される約2年前から、日本のマスコミが韓国に対するドキュメンタリー番組をたくさんしながら、(生き生きした)生活の匂いがぷんぷんと漂う南大門市場が日本人たちの目線を捕らえたのだ。

汗のにおい、人におい、生活を強く感じる南大門市場に対する日本マスコミの大大的な報道は直ちに日本人たちのをその場所に向けたし、当然の現象だが日本人たちの舌を韓国料理が満足してくれた。
言わば韓流ブームと共に韓国料理が日本人たちの人気食品になったのだ。
また '安いよ、安いよ安い!'と叫ぶ南大門市場の生きがあり赤裸裸な呼び込みは、死んだ都市のように決まったシステム社会に慣れた日本人たちの食欲(興味)ぐっと引きつけた。
【2007/05/26 0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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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宿物語①
【신주쿠 모노가타리①】

얼마 전, 80년대 중반에 거의 7.8년간을 동고동락 유학생활을 함께 했던 고려대 C교수가 일본에 왔다.

그를 만난 날 난,1차,2차,3차를 하며 이튿날 새벽 동이 훤히 틀때까지 술을 마셨다.
마시고 얘기하고, 또 마시고 얘기하고...

그 교수가 내게 말했다.
"왜 우린 신주쿠를 벗어나지 못할까?"
그말에 내가 말했다.
"왜 우린 한국식당만을 찾아 다녔을까?"
정말 그랬다.
그날도 우린 어김없이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리고 한국 이자카야에 가서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가라오케 점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C교수가 다시 말했다.
"15.6년 전에도 우린 신주쿠에서 먹고 마셨잖아?"
그의 말대로 과거 고마바 도교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게이오센, 이노가시라센을 따라 옹기종기 몰려 살았던 우리들은, 그 당시에도 요즘처럼 신주쿠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간 당시 유학생들은, C교수처럼 몇 몇 대학에 시간강사를 하다가 전임교수로 자리잡았고, 난 94년 귀국했다가 99년 일한국제문화교류기금을 받아 다시 호세이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일본에 왔다.
바로 이를 두고 C교수는 왜 아직도 신주쿠를 벗어나지 못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맨 처음 신주쿠에 발을 내디딘 것이 82년도다.
81년에 조그만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일본언론사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오게 됐다.

그 때만 해도 신주쿠는 한국인에게 있어 도쿄 시에 떠있는 황량한 무인도와도 같은 지역이었다.
그나마 '한국'의 냄새를 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일부 재일동포들이 영업하고 있는 몇 개의 야키니쿠야가 전부였다.
그 당시 일본을 찾는 한국인에게 낯익은 곳은 다름 아닌 아카사카였다.
아카사카에 가면 서울에서나 맛볼 수 있는 순두부 찌게나 따로 국밥 해장국이 어김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 한 마디 못해도 자신이 원하는 그 모든 한국음식을 완벽하게 먹을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여성에게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거리에 어둠깔리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치마저고리를 입은(그 당시에는 코리언 크럽 호스티스들은 대부분 한복을 입었다) 한국인 여성들이 진한 화장을 하고 밤 출근을 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한국에서 원정 온 거물 정치인이 아카사카의 밤 무대를 휩쓸었고, 때로는 '특별출연손님'으로 일본의 저명인사나 유명 정치인이 코리언 클럽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왕년의 글래머 여배우출신 최 지희 씨가 차린 '레스토랑 지희'와 크럽 '지희'가 명성을 날린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물 든 사람들의 세계에 한해서였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은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기 이전이어서, 일반인들이 외국에 나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특히 여권을 만들 때, 조선 국적을 가진 조총련계 재일동포만 만나도 귀국해서 당장 신고를 해야한다고 종일 안보교육을 받던 시절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처럼 유학생이 흔하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그 때는 청운의 꿈을 가슴에 안고, 진정으로 학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일본의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카사카 크럽에 종사하고 있는 한국여성들은 그래서 '특별한 한국인'에 속했다.
왜냐하면 그녀들 대부분이 위장결혼으로 일본에 건너와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유학비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또한 가진 자는 미국, 없는 자는 일본유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때여서 낮에는 학교, 밤에는 야키니쿠, 이자카야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하는 가난한 유학생들이 실제로 많았다.
요즘처럼 그 흔한 한국 수퍼나 비디오 점, 피시방, 가라오케 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한번 식사하는데 기본적으로 2.3천엔 이상 드는 한국음식을 유학생들은 사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일본인에 의해 '리틀 코리아 타운'으로 불리 우던 아카사카는 자연 주재원, 혹은 한국에서 출장 오는 한국인들이 주 고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유학생들은 우에노의 아메요코 시장과 다케야 건물 뒤에 있는 조총련계의 식품점들을 자주 이용했다.


훤히 : ほのぼのと 広々と
동고동락 : 同苦同楽
벗어나다 : 外れる 抜ける 抜け出す
어김 : 違えること 違反
어김없이 : 間違えなく
어김없이 온다 : きっと来る
옹기종기 : 大きさの違う多くのものがかわいく集まっている
물리다 : 挟まれる
마치다 : 終える 遂げる
그러다가 : そうしているうちに そうして
내디디다 : 踏み出す
계기 : 動機 きっかけ
초청 : 招待
황량 : 荒涼 荒れてさびしい
그나마 : その上にまた
맡다 : (匂いを)嗅ぐ
존재 : 存在
낯익다 : 顔なじみ 見慣れている
유쾌 : 愉快
짙다 : 濃い
어둠 : 闇 暗さ
깔리다 : 敷かれる 一面に張る
진하다 : 濃い
원정 : 遠征
거물 : 大物
무대 : 舞台
정치인 : 政治家
휩쓸다 : 荒らす 広まる のさばる
때로는 : 時には
왕년 : 往年 昔
글래마 : グラマー
명성을 날리다 : 名声を広める
무렵: 頃 時分
한하다 : 限る
이전이어 : 移転 以前 引き続き
조총련계 : 朝鮮総連
당장 : その場ですぐ
종일 : 終日
흔하다 : ありふれている 珍しくない
청운 : 青雲
진정 : まごころ 真情 本当
종사 : 従事
속하다 : 属する
위장 : 偽装
아예 : 初めから てんで 絶対に
주재원 : 駐在員
혹은 : あるいは


【新宿物語①】

ちょっと前、80年代中盤にほとんど7.8年間を苦楽を共に留学生活を一緒にした高麗大のC教授が日本へ来た。

彼に会った日私は、1次会、2次会、3次会をしてしらじらと夜が明けるまでお酒を飲んだ。
飲んで話して, また飲んで話して...

その教授が私に言った。
"どうして私たちは新宿を抜け出せないのだろう(離れられないのだろう)?"
その話に私が言った。
"どうして私たちは韓国料理屋だけを捜して入るのだろうか?"
本当にそうだった。
その日も私たちは間違いなく韓国料理屋で夕飯を食べて、そして韓国居酒屋に行ってお酒を飲み、その後には韓国人が経営するカラオケ店に行って歌を歌った。
C教授がまた言った。
"15.6年前にも私たちは新宿で食べて飲んだんじゃないか?"
彼の言葉通り過去駒場の東京大学キャンパスを中心に、京王線、井の頭線沿いに集まって挟まれて暮していた私たちは、その頃にも今のように新宿で食事をしてお酒を飲んだ。

そうするうちに勉強を終えて帰った当時の留学生たちは、C教授のようにいくつかの大学に時間講師をしていて専任教授として落ち着いたし、私は94年帰国したが99年日韓国際文化交流基金を貰ってまた法政大学に客員研究員として日本へ来た。
まさにこれを置いてC教授はどうしてまだ新宿を抜け出せないかと問ったのだ。
そういえば(考えてみたら)私が最初に新宿に足を踏み入れたのが82年度だ。
81年にやや小い賞を貰ったのをきっかけで日本言論者の招待を受けて日本へ来るようになった。

その時はまだ新宿は韓国人にとって東京都市に浮かんでいる荒れてさびしい無人島とも同じ地域だった。
それでも'韓国'のにおいを感じる(嗅ぐ)ことができる唯一の場所(存在)は一部の在日韓国人たちが営業しているいくつの焼肉屋が全部だった。
その頃日本を訪れる韓国人に見慣れているの場所は他でもない赤坂だった。
赤坂に行けばソウルしか味わえないスンドゥブチゲや別れているへジャンクッパが間違いなくあった。
だけでなく日本語が一言もできなくても自分が望むそのすべての韓国料理を完璧に食べることができた。

それだけか.
韓国女性には決して愉快ではない事だが、街に濃い闇が立ち込めればどこから現われたのかチマチョゴリを着た(その頃にはコリアンクラブホステスたちは大部分韓服を着た) 韓国人女性たちが濃い化粧をして夜の出勤をした。

それでかしばしば韓国から遊びに来た大物政治家が赤坂の夜の舞台を遊びまわっていて(荒していて)、時には'特別出演お客'として日本の著名人や有名政治家がコリアンクラブに姿を現わした。

当時往年のグラマー女俳優出身のチェジヒさんが構えた'レストランジヒ'とクラブ'ジヒ'が名声を広げたこともまさにこのだった。
しかしそれはあくまでも墨汁入った人々の世界に限ってだった。
その時にはまだ韓国は海外旅行自由化が施行される以前なので、一般人たちが外国に出るのは夢のまた夢だった。
特にパスポートを作る時、朝鮮国籍を持った朝鮮総連(朝総連係)在日韓国人だけ会っても帰国してすぐ申告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終日アンポ教育を受けていた時代でもあった。

したがって今のように留学生がありふれてなかった。
本当にその時は青雲の夢を胸に抱いて、 本当に学問をしようとする人々が大体で日本の有数な大学で勉強をした。
そうだったので赤坂クラブに(従事)携わっている韓国女性たちはそのため'特別な韓国人'に属した
何故ならば彼女たちの大部分が偽装結婚で日本に渡って来てホステスで働いていたからだ。
もちろん今は留学ビザで身分を偽装しているがね。(いるってことだ)
また持った者はアメリカ、ない者は日本留学という等式が成立される時のため昼には学校、夜には焼肉、居酒屋などでバイトをして苦学をする貧しい留学生たちが実際に多かった。
このごろのようにその珍しくない韓国スーパーやビデオ店、インターネットカフェ、カラオケなどは初めから存在しなかった。

だから一回食事するのに基本的に 2.3千円以上掛かる韓国料理屋を留学生たちは食べ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うしてみると当時の日本人によって 'リトルコリアタウン'と呼ばれていた赤坂は自然の駐在員、あるいは韓国から出張に来る韓国人たちが主な顧客になるしかなかった。

一方留学生たちは上野のアメ横とタケヤ建物の後にある朝鮮総連の食品店をよく利用した。
【2007/05/26 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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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いころ
【주사위】

"주사위던져졌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널 때 이 말을 외치고 로마로 진격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미 던진 뒤라 돌아킬 수 없으니 운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사위의 기원에 대해서정설이 없다.
인도에서는 인더스 문명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아와 뼈로 만들어진 주사위가 발견됐는데, 마주 보는 면의 합계가 항상 7인 오늘날과 달리 1과 2,3과 4,5와 6이 각각 마주 보는 면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수.당나라 때 오늘날과 같은 주사위 두 개를 이용한 '쌍륙'이라는 놀이를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주사위를 서양에서는 다이스, 중국에서는 사이쯔, 일본에서는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나무 조각굴리며 논다고 하여 윤목이라 불렀다.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놀이도구로, 중세 시대의 귀족은 물론 농민, 여성,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계층퍼져 있었다.
963년에 신성로마제국황제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시킨 이유가 교황이 주사위 놀이를 지나치게 즐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백제 때부터 부녀자들이 쌍륙을 즐겼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통일 신라 시대의 주사위는 신기하게도 14면체로 각 면에 '한번에 술 석 잔 마시기' '소리 없이 춤추기' '덤벼드는 사람 있어도 가만 있기' 등 재미있는 벌칙들이 적혀 있다.
중국 한나라에는 주연에서 18면체 주사위를 던져 술 마시는 순서를 정하는 '주령'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주사위는 놀이도구만이 아니라, 원시인이 미래를 점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 나무 조각에 문자를 새겨 넣고 이것을 굴려 신의 뜻을 점쳤다는 기록이 있다.
1020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은 국경 사이의 영토 소유권 문제로 전쟁을 치르기 직전, 주사위로 신의 뜻을 묻기로 합의하여 싸우지 않고 영토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유럽으로 건너간 주사위는 17세기 이후 각국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보드게임과 다이스게임을 탄생시켰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보드 게임이 유행이다.
디지털 시대에 주사위와 종이판을 펼쳐 놓고 밤새도록 아날로그 게임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셈이다.


주사위 : さいころ
쌍륙 : すごろく
던지다 : 投げる
이끌다 : 引く 引っ張る
외치다 : 叫ぶ
진격 : 進撃
돌이키다 : 向きを替える 振り返る 取り戻す 思い直す
정설 : 定説
추정 : 推定
상아 : 象牙
발견 : 発見
마주 보다 : 向かい合う
양귀비 : 楊貴妃
조각 : 切れ端 かけら
굴리다 : 転がす
도구 : 道具
성직자 : 聖職者
계층 : 階層
퍼지다 : 広がる 広くなる 広まる 知れ渡る 流行る 栄える 増える : 伸びる
신성 : 神聖
제국 : 帝国
교황 : 教皇
지나치다 : 度を越す 度が過ぎる 行き過ぎ
발굴 : 発掘
덤벼들다 = 덤비어들다 : 突っかかる 食って掛かる
벌칙 : 罰則
적히다 : (적다の受) 書かれる 記録される 記される  
주연 : 酒盛り
순서 : 順序
정하다 : 決める 定める
점치다 : 占う
문헌 : 文献(ぶんけん)
새기다 : 刻む 彫る
영토 : 領土


【さいころ】

"さい投げられた!"
紀元前49年、カイザルが軍隊をひきいてルビコン川を渡る時この言葉を叫んでローマに進撃した話は有名だ。
すでに投げた後で取り返えせないから運に任せるという意味だ。
しかしさいころの始まりに対しては定説がない。
インドではインダス文明期のことで推定される象牙と骨で作られたさいころが発見されたが、向かい合う面の合計が常に7の今日と違い 1と 2,3と 4,5と 6がそれぞれ向かい合う面になっている。
中国では隨.唐の国の時の今日のようなさいころ二つを利用した '双六'という遊びをヒョンジョン(王の名)が楊貴妃と一緒に楽しんだという記録が残っている。

さいころを西洋ではダイス、中国ではサイツ、日本ではサイ、我が国では木のかけら転がしながら遊ぶとしてユンモックと呼んだ。
人類が使用した一番古い遊び道具で、中世時代の貴族はもちろん農民、女性、聖職者至るまでほとんどすべての社会階層広がっていた。
963年に神聖ローマ帝国皇帝オート1世が教皇ヨハネ12世を廃位させた理由が教皇がさいころ遊びを度を越して楽しんだからだと言う。

我が国も百済(くだら)の時から婦女子たちが双六を楽しんだ。
1975年慶州アナプ地で発掘された統一新羅時代のさいころはめずらしく14面の各面に '一度にお酒三杯飲むこと' '音なしに踊ること' '飛びかかる人いても黙っていること' など面白い罰則書かれている。
中国の1つの国には酒盛りで18面のさいころを投げてお酒を飲む手順を決める 'チュリョン(主令)'という遊びがあった。

さいころは遊び道具だけではなく、原始人が未来を占うのに使ったことでも推測される。
我が国と中国の文献に木のかけらに文字を刻んで置いてこれを転がして神の意味を占ったという記録がある。
1020年スウェーデンとノルウェーの王は国境の間の領土所有権問題で戦争を始める直前、さいころで神の意味を問うことに合議して争わないで領土問題を解決したりした。

ヨーロッパに渡ったさいころは 17世紀以後各国で広がりながら多様なボードゲームとダイスゲームを誕生させた。
このごろ若者の間ではボードゲームが流行だ。
デジタル時代にさいころと紙版を広げておいて夜中中アナログゲームの楽しさにはまっているわけだ。
【2007/05/25 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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